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리 아펜젤러 (문단 편집) == 일생 == 미국 [[펜실베이니아]] 사우더턴(Souderton)의 [[스위스계 미국인|스위스계]]·[[독일계 미국인|독일계]]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미들네임과 성을 보면 된다. 아펜젤러라는 성은 스위스의 독일어권 사용지역인 스위스 동북 지방의 아펜첼(Appenzell) 칸톤에서 유래한 것이며 미들네임인 거하드([[게르하르트]])는 모계에서 온 성이다.] 그의 부모는 펜실베이니아에 정착한 5세대 이민자 가정이었으며, 부계는 스위스, 모계는 독일 팔츠 지방 출신의 이민가정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기디언(Gideon)은 독일개혁교회 신자였으며, 어머니 머리아(Maria)는 재세례파의 분파인 메노파(Mennonite) 신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펜젤러가 어렸던 시절에도 독일어로 된 마르틴 루터의 성경을 반복해서 읽어주곤 했고 집에서 거의 독일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아펜젤러는 어려서부터 독일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이후 성장하여 펜실베니아의 프랭클린 마셜 대학을 졸업하고 [[뉴저지]] 주의 드루 대학의 신학부에서 수학하고 졸업했다.[* 드루 대학은 신학대로 굉장히 유명하고 저력 있는 명문 대학이다. 물론 다른 학부도 유서깊다. 아펜젤러가 엘리트 계급임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 가풍의 영향으로 본래는 [[장로회]] 신자였으나 성장하며 교단을 옮겼으며 한국에선 감리회 선교사로 활동했다. 희비교차가 되는 부분인데, 처음에는 [[조선]]이 아니라 [[인도 제국]]에 선교활동을 하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이는 언더우드도 마찬가지로 인도 제국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1883년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서 개최된 전미 신학교 연맹 수련회에서의 기록까지만 봐도 인도행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로 미국인의 선교 활동이 자율화 되자 조선행이 가능해졌던 게 결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아펜젤러의 변화는 1884년 프린스턴 신학교 선교 모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1885년 [[부활절]]인 4월 5일에 갓 혼인한 그의 아내 엘라와 함께 장로회 선교사인 호러스 언더우드 그리고 같은 감리회 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튼]][* [[이화학당]]과 [[삼일소학당]]의 설립자]과 그녀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과 함께 [[조선]]에 입국하려 했으나 조선 땅을 밟자마자 [[미군]] 측의 조지 클레이턴 포크(George Clayton Foulk) 대사가 "조선의 정세가 위험하여 젊은 여성(아펜젤러 부인)은 입국할 수 없다"고 불허하였다.[* 당시 [[갑신정변]] 발생 직후여서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엘라 아펜젤러는 [[임신]] 2개월 차이기도 했다. 이 때 태중에 있던 아이가 [[이화여자전문학교]] 제6대 교장이자 마지막 외국인 교장인 앨리스 아펜젤러였으며 그 뒤를 이어 최초의 한국인 교장이 된 인물이 [[김활란]]이다.] 결국 아펜젤러 부부는 잠시 [[일본 제국|일본]]으로 가 머물다가 7월 29일에 다시 입국하였다. 비록 입국이 미뤄졌으나 그 날짜에 의의가 있기에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언더우드, 스크랜턴 모자, 아펜젤러와 함께 이 날을 [[한국의 개신교]] 최초의 날로 본다. 여담으로 이 때 배에서 내려 입국할 당시, 처음에는 무심코 아펜젤러가 먼저 내리려 했다. 그러다가 최초로 한국 땅에 발을 내딛는 중요한 순간임을 깨닫고, 자신의 아내인 엘라가 먼저 내리게 했다. ~~진정한 로맨티스트~~ 이후 조선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국내 최초의 서양식 [[사립학교]]이자 감리회 [[종립학교]]인 [[배재학당]]을 설립하였다. 배재학당은 [[감리회]]를 학교 이념으로 하여 세워지긴 했지만, 아펜젤러는 언더우드처럼 종파와 교리에 상관없이 조선인들에게 선교활동을 펼치라고 가르침을 행했다.[* [[배재학당]]에 종교적 특성이 두드러진 건 오히려 [[광복]]이 이뤄진뒤 한참 후로, 국민들이 살 만해지자 학교 측에서도 차츰 종교 이념을 안착하였다. 그런 뒤 현대에 들어오면서 다시 종교 색채가 옅어졌다고.] 이때가 그의 나이 겨우 27세였다. 배재학당의 학훈인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겨라.'를 만들었고,[* 정확히는 아펜젤러가 직접 한글로 적은 것은 아니고, 이는 훗날 [[배재고등학교]]의 교사 중 한 명이 영어를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그의 아들인 헨리 다지 아펜젤러는 배재교가를 작사작곡했다. 모교 [[프린스턴 대학교]]의 응원가를 개사해 만들었다고 한다. 배재학교의 교표가 프린스턴 대학의 교표와 비슷한 이유도 바로 이것.[* 헨리 다지 아펜젤러가 프린스턴 대학의 학생이었던 것 처럼 언더우드 역시 프린스턴 출신이기에 [[연희전문학교]]의 교표도 프린스턴 대학과 흡사하다. 이것이 그대로 이어져 [[연세대]]의 교표가 되었다.] 1902년에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에 위치한 [[https://m.place.naver.com/place/13491784/home?entry=plt|어청도]] 앞 바다에서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자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대판산성주식회사의 구마가와마루 호에 타고 있다가 같은 회사의 선박 기소가와마루 호와의 충돌사고로, 성경 번역 작업에 동참하기 위해 같이 승선한 조한규와 [[정신여학교]] 학생을 구하려 탈출을 미루었고 결국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순직하였다. 아펜젤러의 시신은 현재까지도 인양하지 못했으며,[* 바다에 빠진 이상 앞으로도 인양되기 힘들 것이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서울)|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가묘가 만들어져있다. 이런 아펜젤러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서천]] 지역에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이 세워져 운영되고 있다. 한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는 서로 절친한 친구였고, 교류도 왕성하여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연세대학교]]에는 아펜젤러의 이름을 딴 [[연세대학교/신촌캠퍼스#s-2.1|아펜젤러관]](사적 제277호)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